그때에 수보리는 청정무구한 부처님께 고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여 우리들이 받들어서 수지독송하였으면 좋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을 금강반야바라밀이라하여 너희들은 받들어 수지독송하여라.”

그리고 수보리야,

내가 지금 말한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적으로 정해져 있는 반야바라밀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어떤 법이라는 것을 설한 바가 있는냐?

수보리가 청정무구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어떤 법이 있다는 것을 설하신 적이 없습니다.

삼천대천 세계에 있는 티끌이 얼마나 많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는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세존이시여, 아주 많습니다.

수보리야, 모든 티끌이라는 것은 실존하는 실체가 있어 티끌인 것이 아니라

어떤 형상을 지칭하며 그 이름이 티끌일 뿐이다.

그리고 여래가 설한 세계도 역시 어떤 세계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형상의 세계를 지징하며 그 이름이 세계라 하였을 뿐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보았다고 말할 수가 있느냐?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보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삼십이상이란 실체가 정해져서 존재하는 형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래께서 현재에 나타내 보여지는 32가지의 형상들을 지칭하여 이름하길 삼십이상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선여인이 항하에 있는 모래수 만큼이나 되는 무수한 목숨을 보시에 사용하였다 하더라도

다른 어떤 이가 있어 금강경이나 사구게등을 이해하여 생명과 같이 받아지니고 외우고 독송하면서

타인을 위해 가르치고 널리 포교한다면 이 보시의 복덕이 더욱 깊고 수승한 것이다.

그리고 수보리야, 이 경이 설하여 진다거나 타인을 위해 전해진다거나 수지독송하거나 사구게 등의 뜻이 마음으로

항상 생각하며 잊어버리지 않는 곳에는 일체의 세간에 있는 천인·아수라등이 부처님이 계시거나 불탑과 사원이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여 모두가 공양을 받들어 모신다.

그러므로 어떤 누구라도 금강경을 생명을 다해 마음속으로 잊어버리지 않으며, 외우고, 독송하는 곳에 어찌 공양하고

그 공덕을 찬양하지 않겠느냐?

수보리야,

이렇게 수지독송하는 사람은 최상 제일의 희유한 법을 성취한 것이며, 또한 이 금강경이 설해지는 곳은

부처님이 계신것과 같고 존경받는 부처님의 제자가 계신것과 같다.

 

수보리야,

항하중에 있는 모든 모래수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항하에 있는 모래수는 얼마나 많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단 하나의 항하중에 있는 모래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어찌 그 모든 항하의 모래수를 헤아려서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수보리야,

내가 지금부터 현상세계에 나타나는 현상들의 진실된 복덕의 실체를 말로써 표현하여 너에게 말하자면,

만일 선남자·선여인이 비유한 바와 같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항하사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의

크기 만큼이나 많은 칠보를 가지고 보시에 사용한다면 이 복덕은 얼마나 많다고 생각하느냐?

세존이시여, 너무나 많습니다라고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만일 다른 선남자·선여인이 있어 금강경중에 있는 사구게등이나 한 문장이나마 받아지니고, 이해하고, 실천하며,

독송하거나 타인을 위하여 이 금강경의 의미를 설명하여 주는 보시의 복덕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서

보시하는 복덕보다 더 수승한 것이다.

부처님은 다시 수보리에게 물었다.

여래께서 전생에 연등부처님 처소에 계실 당시에 어떠한 결정적으로 정하여진 어떤 법이 있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과거 전생에 연등부처님의 시대에 계실적에 여실하게 나타나고 결정적으로 정해져 있는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해져 있지 않은 법에 의존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것을 성취하였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장엄함에 있어서 장엄이라는 실체가 있어서가 아니라

부처님의 국토에서 보살행을 한 것을 장엄이라 이름하여 불러줄 뿐이다.

그러한 고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여래와 같은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야 하고 형상·소리·냄새·맛·감각·진리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아 이와같이 어떤것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머무는바 없이  집착됨이 없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것의 마음을 일으켜야하는 것이다.

수보리야,

어떤 사람을 비유하여 말하자면 몸이 수미산만큼하다고 말을 한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몸이 크다고 생각하느냐?

“아주 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몸이란 어떤 진실되고 실체가 정해져 있는 몸을 기준하여 말씀하신 몸이 아니라

형상으로 나타내고 있는 현상적인 몸을 표현하여 몸이 아주 크다고 이름하여 불렀을 뿐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수다원과를 증득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성인의 경지에 들어갔다는 과위를 수다원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 과위가 정해져 있는

경지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이나 소리·냄새·맛·촉감이나 어떤 진리의 결정적인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한 집착됨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이름을 붙여서 수다원이라고 말할 뿐입니다라고

수보리가 말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스스로를 생각하길 나는 능히 사다함과위를 증득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이란 한번 왔다 간다는 것을 지칭하는 이름이 사다함이라 부르는 이름일 뿐이지 사실은 왔다

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을 사다함이라고 이름지어 부를뿐입니다 라고 수보리가 대답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냐?

아나함이 스스로를 생각하기를 나는 능히 아니함과위를 증득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그 이름의 의미가 오지 않는다는 것으로 불리워 질뿐이며 실제적으로는 온다는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없는 연고로 이름하여 아나함이라 불리워 질뿐입니다라고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능히 아라한의 도를 성취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정하여진 어떤법이 없다는 것을 이름하여 아라한이다.” 라고 이름지어 부를 뿐이며 이것은 실제적으로

결정적인 어떤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라는 것은 결정지어 정해져 있지 않는 것이 법이라 이름하여 아라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만일 아라한이 나는 이 아라한의 도를 성취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것은 아·인·중생·수자상에 집착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를 가르쳐서 말씀하시길 너는 무쟁삼매를 성취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무쟁삼매를

성취한 자들 중에서 최고 제일이라고 지적하셨는데 이것은 욕심을 제일 멀리한 아라한이라는 뜻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욕심을 제일 멀리한 아라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일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면,

세존께서는 저를 가리켜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말씀하시는 것은 제가 실제로 아란나행이라는 행동을하고 있지도 않으며 아란나행을 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는 고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수보리의 행동을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이름으로 표현하여 수보리의

행을 지칭하였습니다라고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어떤이가 삼천대천세계만큼 가득한 칠보를 가지고서 이것을 보시에 사용하였다면 이 사람이 보시한 공덕으로

얻어지는 복덕은 얼마나 많다고 생각하느냐?

“아주 깊고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이라는 것은 진실된 복덕이라는 성품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래서 여래께서는 복덕의 성품은

깊고 많다는 등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복덕이란 실체적인 어떤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라고 수보리가 대답했다.

수보리야!

무수한 칠보로 보시를 하는 이가 있고, 다른 이는 여래께서 설하신 금강경 중에서 사구게등의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며

생활하거나 타인에게도 이 경의 뜻을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전하여 준다면 이 복덕은 칠보로 보시하는 이의 복덕보다

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월등히 수승한 것이다.

수보리야!

왜냐하면, 이것은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 깨우쳐 부처님이 되신것과 모든 부처님이 깨우침을 얻었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말하는 법은 모두가 이 경에 의존하여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고 이름하여 불리워지는 법이라는 모두가 결정적으로 정하여져 있지 않는 것이므로 불법이다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불법이 아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지칭하는 어떤 법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리고 여래가 어떤 것을 법이라고 설하신 바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법이라는 진의를 나의 소견으로 해석하고 이해할 때 어떤 결정적으로 정해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닌 것을 법이라고 이름하였으며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여 법이라고 말씀하신것 뿐입니다.

역시 이와같이 정해져 있지 않은 법을 여래께서는 설하시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이제까지 설하신 모든 법은 어떤 것 하나라도 취하여 얻을 수가 없고 어떤 것을 가설하여

말한다 하더라도 법이라는 실체를 정하여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래가 설하신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법이 아닌 것도 없으며, 법이 아닌 것이 아닌것도 없습니다.

수보리야!

그러므로 법은 정해진 어떤 진리라고 부르는 법이라는 실체가 없으므로

“일체의 현인과 성인은 이렇게 정해져 있지 않은 무위법에 의존하여 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해진 법이 없는 연고로

성인과 현인이 차별의 현상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수보리가 청정무구한 부처님께 질문하였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이와같이 설하신 법문을 듣고서 여래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며 여래와 같은 행동을 하며 청정한 신심을

일으킬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한 말은 하지 말아라,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이천 오백년 뒤에는 전생에 불법과 인연을 맺어 계를 받아지니고

복을 닦아온 자가 있어서 이러한 설법이나 문장을 듣고 능히 신심을 일으킨다. 

이렇게 신심을 일으키는 중생은 전생에 한 부처님 두 부처님이나 셋·넷·다섯부처님에게 이미 불심의 선근 종자를 심어

왔었고, 또한 헤아릴 수 없는 생명을 받아 윤회하는 무수한 세월동안에 불법을 닦아온 모든 좋은 선근종자가 인연

맺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법에 대한 설법을 듣거나 문장을 듣고서는 한 생각에 뜻을 이해하고 느끼게 되어 청정한

신심을 일으키게 된다.

수보리야!

이것은 여래가 이러한 중생이 이와같이 무량한 복덕을 닦아 왔다는 것을 여래가 닦아둔 불지혜로 모두 알고 모두 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중생이 미래세에 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중생들은 다시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고 인식하는 관념도 없으며,

역시 법이 아니라는 관념의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중생들이 마음에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다시말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되어 있는 것이다.

또 법이라고 인식하는 관념의 생각이 마음속에 잠재해 있다면 이것도 역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중생은 법이라고 하는 데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법이 아니다라고 하는 관념에도 집착하지 아니한다.

이러한 고로, 여래께서는 

“불법이라는 것은 땟못과 같은 것이므로 도를 이룬후에는 법이라는 집착없이 불법마저도 놓아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비법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라는 법을 항상 너희 비구들에게 설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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